고령 인구 많은 도시, 재난 대피소는 안전한가?
전주는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로, 그중 완산구는 전주한옥마을과 중앙시장, 전북대병원 등 주요 시설이 집중되어 있어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이다. 동시에 완산구는 고령층 비율이 높은 지역이기도 하다. 골목 상권 중심의 노후 주택가와 전통시장 근처에는 60세 이상 거주민이 많고, 이들 중 상당수가 독거노인이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감안할 때, 완산구의 재난대피소는 단순한 공간 확보를 넘어 ‘접근성과 사용 편의성’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지진, 화재, 폭염, 한파와 같은 재난은 순간적인 대응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피소까지 얼마나 빠르고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느냐가 생사를 가를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전주시 완산구 내 대표적인 재난대피소 6곳을 직접 탐방하면서, 위치, 표지판 유무, 고령자 접근 경로, 비상 설비 상태, 현장 인식 등을 실측하고 분석했다. 행정 정보만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실제 대피소의 현실’을 고령층의 시선에서 점검해본다.
완산구 재난 대피소 6곳 실측 탐방기: 위치는 있지만 접근성은 글쎄?
첫 번째로 찾은 곳은 중화산동에 위치한 전주서중학교 운동장이었다. 대피소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외부에서 해당 장소가 대피소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표지판은 없었다. 학교 정문은 평일 대부분 닫혀 있었고, 경비원에게 문의해야만 출입이 가능했다. 고령자가 재난 상황에서 이 학교로 이동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매우 어려워 보였다.
두 번째는 서신동 주민센터 옆 공터였다. 도심지와 가까워 접근성은 나쁘지 않았지만, 차량 통행량이 많고 횡단보도 신호 대기 시간이 길어 노약자가 도보 이동 시 교통사고 위험이 존재했다. 또한 공터에는 나무 그늘 외에 별도 구조물이 없어 비바람이나 폭염 상황에 적절하지 않았다.
세 번째 대피소는 효자동 남초등학교 운동장이었다. 학교 외벽에는 '지정 대피소'라는 표식이 작게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출입이 통제돼 있었고, 인근 거주민도 "여기가 대피소인 줄 몰랐다"고 답했다. 특히 운동장까지 가는 경로는 언덕길로 되어 있어 고령자에겐 부담이 컸다.
네 번째는 전라감영 역사공원 일부 공간이었다. 도심 중심에 위치해 접근은 쉬웠지만, 대피소로써의 인프라는 거의 없었다. 화장실, 벤치 외에는 별다른 설비가 없고, 구조물 없이 개방된 공간이라 재난 발생 시 긴급 대피보다는 단순 피신에 가까운 기능만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다섯 번째로는 삼천동 덕일초등학교 운동장을 확인했다. 이곳은 지대가 높지 않고 인근 주택가와 가까워 상대적으로 유리했지만, 마찬가지로 학교 운영 시간 외에는 출입이 어려웠다. 운동장 입구에는 표지판이 있었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 위치에 설치돼 있었다.
여섯 번째는 완산구청 뒤편 녹지공간이었다. 행정기관 인근이라 관리 상태는 양호했지만, 고령자가 접근할 수 있는 인도 경사도가 가파른 편이었고,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미끄러질 가능성이 높았다. 비상시 대피 공간으로는 공간적 한계도 있어 보였다.
고령층 입장에서 바라본 재난 대피소 시스템의 현실
실제 탐방 중 만난 고령층 시민 다수는 “우리 동네 대피소가 어딘지 잘 모르겠다”, “평소에는 관심조차 없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부는 대피소가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출입 방법이나 재난 발생 시 어떤 순서로 행동해야 할지 전혀 모른다고 말했다.
문제는 단순한 정보 부족만이 아니었다. 접근 경로의 위험성, 물리적 제약, 심리적 장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고령자는 평상시에도 외출에 부담을 느끼는데, 재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운동장이나 언덕 위 공터까지 이동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재난대피소로 지정된 장소 대부분이 평소에는 출입이 제한되거나, 이용 방법이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고령층은 모바일 앱 사용률이 낮고, 디지털 지도보다 종이 인쇄물을 선호하는데, 이를 고려한 안내물이나 포스터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비상 설비 부족 문제는 심각했다. 생수, 응급처치 키트, 야외 쉼터, 야간 조명 등은 대부분 비치되어 있지 않았고, “재난 발생 시 지자체에서 물자를 지원한다”는 원론적 설명만 반복되었다. 그러나 재난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초기 몇 시간의 대응이 생명을 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상시 물자 비치가 절실하다.
완산구 내 일부 대피소는 상업지구, 재개발 지역, 도로 근처에 위치해 있어 소음, 차량 위험, 비좁은 공간 등의 물리적 제약도 함께 존재했다. 정비된 공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피소로 지정된 경우, ‘단순 등록을 위한 대피소’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고령자 중심의 재난대피소 시스템으로 전환돼야 한다
고령층 비중이 높은 지역에서는 기존의 일괄적인 대피소 지정 방식으로는 실질적인 대응이 불가능하다. 이제는 고령자 맞춤형 재난대응 체계가 필요하다.
첫째, 지면 중심의 시각적 안내물 설치가 시급하다. 종합안내판뿐만 아니라 마을회관, 아파트 입구, 버스정류장 등 고령자가 자주 이용하는 생활 공간에 ‘가까운 대피소 위치도’와 ‘도보 경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포스터나 스티커 형태로 설치해야 한다.
둘째, 저지대 대피소 확보 및 ‘소형 마이크로 대피소’ 도입이 필요하다. 기존의 대형 운동장이나 고지대보다, 평지에 있는 마을회관, 경로당, 빈 공터 등을 활용해 소규모라도 접근성 좋은 대피소를 운영해야 한다.
셋째, 지속적인 안내 교육과 시뮬레이션 훈련이 이뤄져야 한다. 연 1회라도 고령층이 실제로 대피소까지 걸어가보고, 문 여는 법, 물품 찾는 법 등을 경험해본다면 위기 대응 능력이 크게 향상될 수 있다.
넷째, 응급 키트 상시 배치가 이뤄져야 한다. 비상식량, 생수, 랜턴, 담요, 휠체어, 간이 의자 등 최소한의 비상 물자는 각 대피소마다 보관함 형태로 배치되어야 하며, 그 위치와 사용법도 간단하게 안내돼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동 단위 자원봉사자 또는 대피소 관리자 지정이 필요하다. 위급 상황에서 혼자 이동하기 힘든 고령자를 도와줄 수 있는 ‘지정 관리자’가 있어야 하고, 연락처 및 위치 정보는 주민들에게 사전 배포되어야 한다.
재난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지만, 그 피해는 가장 약한 계층에게 가장 크다. 전주 완산구처럼 고령층 비율이 높은 도시는 이제부터라도, ‘누구나 대피할 수 있는 구조’를 넘어 ‘노약자도 대피할 수 있는 구조’로 도시 안전망을 재설계해야 할 시점이다.
이번 탐방을 통해 고령자 입장에서 본 완산구 재난대피소의 현실을 살펴봤다.
다음 글에서는 노인 비율이 높은 농촌 지역의 대피소 실태를 분석해
도시와 농촌 간 재난 대응 격차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관심 있다면 꼭 이어서 확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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