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대피소가 있다는 말 속에 빠진 중요한 요소들
재난대피소라고 하면 흔히 공원, 운동장, 학교 같은 넓은 공간을 떠올린다.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가 우선 고려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난은 단순한 순간의 대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재난 대피소는 단순히 몸을 피하는 공간이 아니라, 최소 수 시간에서 수일간 머물면서 생존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대피소의 화장실, 전기, 물 공급 시스템은 생명과 직결되는 요소다. 화장실이 없다면 기본적인 위생이 무너지고, 전기가 끊기면 통신·조명·정보 전달이 모두 불가능해진다. 물은 말할 것도 없이 생존의 가장 기초다.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대피소는 이 세 가지 요소를 공간만 있으면 되지라는 식으로 단순화해서 설계해놓고 있다. 특히 운동장이나 공터처럼 야외 공간 중심으로 설정된 대피소들은 화장실, 조명, 급수 시설이 전무하거나 ‘있다고만 써놓고, 실제론 준비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번 글에서는 수도권 및 지방 중소도시 내 대피소 7곳의 실측 결과를 토대로, 화장실, 전기, 물 공급이 실제로 가능한가, 그 실태와 문제점을 체험 기반으로 점검해본다.
실제 재난 대피소 7곳 실측 결과: 있다고 돼 있지만, 막상 가보니 없었다
첫 번째로 확인한 곳은 서울 강동구의 한 근린공원 대피소였다. 도심 속 넓은 공간으로 등록되어 있었지만, 고정식 화장실은 멀리 떨어진 곳에 하나만 있었고, 야간에는 문이 닫혔다. 비상시 사용할 수 있는 간이 화장실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두 번째는 경기도 수원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 평일에는 학교 운영으로 화장실 이용이 제한되며, 운동장에는 별도 화장실이 설치돼 있지 않았다. 전기는 운동장 조명 외에는 없었고, 내부 콘센트나 발전기 같은 시설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세 번째는 충북 청주의 한 주민센터 옆 공터였다. 지도상 대피소로 등록돼 있지만, 실제로는 주변에 물 공급이나 조명 시스템이 전혀 없는 단순한 공터였다. 비상시 필요한 최소한의 설비도 없어 ‘여기서 며칠을 버틴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네 번째는 부산 해운대구의 해변 인근 공원 대피소였다. 바닷가 바로 옆이라는 입지에도 불구하고, 고정식 화장실은 멀고, 수돗물도 이용 불가 상태였다. 조명도 해가 지면 어두워지기 때문에 야간 대피는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다섯 번째는 전주 완산구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 자체는 넓었지만, 외부인의 화장실 접근은 차단되어 있었고, 교내 전기 시스템은 개방되지 않았다. 즉, 비상시 전기 공급은 기대하기 어렵다.
여섯 번째는 대구 달서구의 공원형 대피소. 조명이 일부 있었지만, 전기 콘센트나 충전 시설은 없었고, 수돗물은 ‘동파 방지로 동절기 차단’된 상태였다. 화장실은 있었지만, 청결 상태가 나쁘고 야간에는 잠겨 있었다.
마지막 일곱 번째는 제주 제주시의 종합경기장 내 공터였다. 규모는 크지만, 기본적인 전기 공급, 실외 화장실, 급수 시설은 모두 운영 시간 외에는 차단되어 있었다. 실제 재난 상황에서 ‘누가 이걸 개방해주느냐’는 주민들의 공통된 질문이었다.
이처럼 대피소 내부의 기본 생존 설비는 거의 전무하거나, 조건부로 제한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가: 재난 대피소 설계의 맹점
대피소는 대부분 자연재해(지진, 태풍, 화재 등)를 기준으로 행정상 등록된 공간이다. 이때 가장 중점적으로 고려되는 것은 ‘공간의 넓이’와 ‘수용 가능 인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공간 안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머물며 생존할 수 있는 여건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첫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예산 및 관리 주체의 부재다. 예컨대 초등학교나 주민센터 운동장은 교육청이나 지자체가 관리하지만, ‘대피소 운영을 위한 물자 보급, 전기 시설, 비상 물 설치’ 등은 별도 예산 없이 단순 지정만 된 경우가 많다.
둘째는 비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운영 시간이다. 대부분의 공공시설은 ‘운영 시간 내 이용’만 가능하다. 야간이나 주말, 공휴일에는 화장실 문이 잠기고, 전기 공급이 차단된다. 그러나 재난은 언제 발생할지 모른다. 특히 정전이나 통신 두절이 일어나는 밤 시간에는 이들 시설을 이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셋째는 유지·보수가 전혀 되지 않는 간이 시설이다. 일부 대피소에는 간이 화장실이나 비상 수도가 설치된 경우도 있으나, 관리가 되지 않아 고장 나거나 폐쇄된 상태로 방치된 경우가 많았다.
넷째는 사용자 중심이 아닌 행정적 등록 위주의 시스템이다. 시민의 편의나 안전보다는, 법적 요건을 충족하기 위한 ‘대피소 수 늘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시민의 실생활과는 거리가 먼 접근 방식이다.
이런 맹점들로 인해 재난 대피소는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기능하지 못하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실질적인 재난 대피소 운영을 위한 개선 제안
이제는 ‘공간 확보’에서 ‘생존 가능 공간 확보’로 대피소 개념이 전환되어야 한다. 특히 화장실, 전기, 물 공급 같은 기본 설비는 공간 면적보다 더 중요한 안전 요소다.
첫째, 모든 재난 대피소에 이동형 화장실을 기본 배치해야 한다. 간이 화장실은 가격 대비 효용성이 높고, 공간 제약 없이 설치 가능하다. 이와 함께 손세정제, 쓰레기 봉투 등 위생 보조 물품도 상시 비치되어야 한다.
둘째, 태양광 기반 비상 전력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일부 지자체는 태양광 랜턴이나 이동형 충전기를 비치하고 있으나, 아직 전국적 확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최소한 조명, 핸드폰 충전, 간단한 통신 장비 사용이 가능하도록 독립 전원 시스템이 도입되어야 한다.
셋째, 지하수 또는 별도 물탱크를 활용한 급수 시스템 설치가 필요하다. 일정 규모 이상 대피소에는 물탱크를 설치해 생수 공급을 자동화하고, 수돗물 차단 시에도 대체 수단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넷째, 비상 설비의 점검과 갱신을 위한 전담 예산과 담당자 배정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있다’고만 해놓고 방치한다면, 재난 발생 시 더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다섯째, 시민 대상 교육과 체험형 훈련 프로그램 도입이 병행되어야 한다. ‘내가 사는 지역의 재난 대피소는 어디에 있고, 전기는 어떻게 켜고, 화장실은 어디에 있는지’를 사전에 경험하게 하는 것이 진짜 대응력이다.
재난 대피소는 단순히 공터가 아니다. 재난 대피소는 생존 공간이다. 재난 대피소 안의 화장실, 전기, 물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곳은 더 이상 대피소가 아니라 사고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당신이 믿고 있는 재난 대피소, 정말 쓸 수 있는 곳일까요?
다음 글에서는 비상 상황별 재난 대피소 유형별 차이점을 중심으로,
지진·화재·해일·폭염 상황에 각각 적합한 대피소 설계 기준을 정리해볼 예정입니다.
꼭 확인해보세요.
'재난 대피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역 재난 대피소의 피난 안내 동선, 과연 논리적인가? (0) | 2025.07.03 |
---|---|
재난 발생 시 노약자·장애인을 위한 재난 대피소는 얼마나 준비되어 있을까? (0) | 2025.07.03 |
우리 동네 재난 대피소는 실제로 사용할 수 있을까? 직접 확인해보니 (0) | 2025.07.02 |
청주 흥덕구 재난 대피소 체험기 – 도심형 대피소의 구조적 한계, 직접 확인해보니 (1) | 2025.07.02 |
수원 영통구 재난 대피소 실사 후 느낀 점 – 안전 시스템은 정말 준비되어 있을까? (0) | 2025.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