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중심 재난 대피소 훈련, 이렇게 기획하자 – 실전형 프로그램 운영 가이드
재난 대피소 훈련, 장애인을 위한 별도 프로그램이 아닌 ‘중심’에 둬야 한다
재난 대피소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 생명을 지키는 최후의 공간이다. 하지만 이 공간이 실제 위기 상황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작동할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다. 특히 장애인에게 재난 대피소는 단지 이동의 문제를 넘어, 물리적 진입부터 정보 접근, 체류의 지속 가능성까지 복합적인 조건이 작동해야만 이용 가능한 공간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자체와 공공기관에서는 여전히 대피소 운영이나 훈련 프로그램을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하고 있다. 장애인은 그 틀 안에서 보조 대상으로 설정되거나, 단순한 예외 상황으로 취급되기 쉽다.
이러한 관행은 실제 재난 발생 시 장애인이 생존의 기회를 구조적으로 차단당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이제는 훈련 프로그램의 설계 단계부터 장애인을 ‘중심 사용자’로 두는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훈련은 단지 피난 경로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 시 몸으로 행동하고 주변과 협업하며 상황을 돌파하는 일종의 생존 시뮬레이션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장애인 당사자의 신체 조건, 감각 경험, 이동 방식 등이 반영되지 않는다면, 그 훈련은 허상에 불과하다.
장애인을 중심에 두는 훈련은 ‘특별 대우’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기준을 새롭게 세우는 접근이다. 장애인이 접근하고 머무를 수 있는 대피소라면, 고령자, 어린이, 임산부 등 누구에게나 안전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즉, 훈련이 장애인을 위한 것이 되는 순간, 실질적으로는 모두를 위한 훈련이 될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장애인 중심 재난 대피소 훈련 프로그램을 어떻게 기획하고 설계할 수 있는지, 단계별로 구체적인 방향과 고려할 점을 다뤄본다.
재난 대피소 훈련 기획은 당사자 참여와 체험 중심으로 구성해야 한다
장애인 중심의 재난 대피소 훈련 프로그램은 훈련 대상이 아닌 ‘훈련 설계자’로서의 장애인 당사자 참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과거의 재난 훈련은 대부분 전문가나 공무원이 시나리오를 만들고, 주민들은 그에 따라 행동을 따라가는 형태였다. 하지만 장애인을 중심으로 하는 훈련에서는 그 구조가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훈련의 전 과정을 장애인 당사자의 경험과 감각을 중심으로 설계하고, 그들이 실제 어떤 위험을 감지하고 어떤 제약을 겪는지를 기준 삼아야만 현실적인 시나리오가 만들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휠체어 사용자의 입장에서 대피소까지 이동하는 경로는 단순한 직선이 아니라 여러 장애물을 피하고 돌아가야 하는 복잡한 구조일 수 있다. 시각장애인은 음성 유도 장치나 촉각 안내 시스템이 없다면, 대피소 내부를 자유롭게 이동하기 어렵고, 청각장애인은 방송 시스템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순간 정보 단절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실제 조건을 훈련 시나리오에 반영하지 않고 단순히 ‘대피소로 이동한다’는 행동만 반복한다면, 이는 모의훈련이 아닌 보여주기식 퍼포먼스에 그칠 수밖에 없다.
체험 중심의 훈련은 장애인 스스로가 움직이고, 그 상황을 관찰한 비장애인 시민이 함께 반응하면서 이뤄질 때 진짜 효과를 갖는다. 예를 들어 시나리오별 훈련을 진행할 때는 장애인 한 명당 보조자 한 명을 배치하여 훈련 내내 함께 이동하고 행동하도록 구성하면, 자연스럽게 동선의 불합리성과 불편을 관찰하고 공유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한 장애 인식 개선을 넘어, 재난 대응 감각을 공동체 전체가 새롭게 학습하는 기회가 된다.
또한 훈련 종료 후에는 반드시 피드백 세션이 포함되어야 한다. 장애인 참가자와 비장애인 참여자가 각자 느낀 점, 불편했던 점, 대처가 잘 이뤄졌던 순간들을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 훈련은 단순한 행동 모사가 아니라 실제 대안을 모색하는 사고 훈련으로 확장될 수 있다. 이처럼 장애인을 중심에 둔 훈련은 지역의 안전을 단순히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재설계하는 경험으로 발전할 수 있다.
재난 대피소 훈련 프로그램은 지역 현실과 시설 조건을 반영해야 한다
장애인 중심의 대피소 훈련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려면, 해당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실제 대피소의 구조를 정밀하게 반영하는 설계가 필요하다. 많은 훈련이 이론적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실제 현장에서의 적용성은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대개 프로그램이 추상적인 기준에 맞춰 구성되었거나, 실제 시설 점검 없이 짜인 시나리오에 따라 운영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매뉴얼에는 경사로가 설치된 것으로 되어 있어도, 실측 경사 각도가 너무 가팔라 휠체어 사용자에겐 현실적으로 이용이 불가능한 경우가 존재한다.
따라서 훈련 설계 이전에는 반드시 현장 사전 점검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훈련에 사용될 대피소의 구조, 출입구 위치, 주변 도로 상황, 접근성 설비, 안내 시스템, 휴게 공간, 화장실 상태 등 모든 물리적 조건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장애인 당사자의 관점에서 재점검해야 한다. 이때 훈련 시나리오도 해당 대피소에서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예컨대, 야간 정전 상황, 비상 방송 미작동, 안내 인력 부족 같은 돌발 시나리오를 삽입함으로써 훈련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다.
지역별 특성도 고려되어야 한다. 산간 지역은 도보 접근성이 낮을 수 있고, 도심 대피소는 밀집 구조로 인해 공간 이동이 어려울 수 있다. 이처럼 물리적 조건과 장애 유형 간의 상호작용을 고려한 시나리오가 있어야 훈련은 실질적인 대응력을 높이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장애인 중심의 대피소 훈련은 훈련 자체만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것은 실전에서의 생존 가능성을 사전에 검증하는 시뮬레이션이자, 향후 정책 개선과 시설 보완의 기초 데이터를 생성하는 수단이다. 지역 현실이 훈련의 출발점이 되어야, 그것이 다시 현실을 바꾸는 순환 구조로 작동할 수 있다.
재난 대피소 훈련은 공동체를 연결하는 소통의 장으로 확장돼야 한다
훈련은 행동의 반복이 아니라 관계의 재구성이다. 장애인 중심 재난 대피소 훈련은 단지 특정 상황에 대비하는 대응 연습이 아니라, 지역 사회 전체의 재난 감수성을 높이고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는 실천의 장이어야 한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재난은 개인의 생존 역량만으로 극복되지 않으며, 특히 장애인에게 재난 대응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협조와 지역 인프라의 지원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훈련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대처하는 경험을 공유하며, 공동체 안에서 ‘안전’을 재정의하는 과정을 담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장애인 중심 대피소 훈련 프로그램은 사회적 소통 구조를 중심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참여자는 단순히 배우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훈련을 통해 서로의 역할과 한계를 이해하고, 연대하는 경험을 갖게 된다. 훈련에 함께 참여하는 공무원, 자율방재단, 이웃 주민, 학교 학생, 청년 봉사자들은 단지 도우미가 아니라 훈련의 또 다른 피훈련자이자 감각 공유자다. 장애인의 불편은 특정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시스템 문제임을 확인하는 이 과정은 안전을 둘러싼 인식 지형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훈련 후에는 반드시 주민 참여형 피드백 세션이나 소규모 포럼, 설문조사 등 다양한 형태의 의견 수렴 절차가 포함되어야 하며, 수집된 내용은 지자체의 재난 계획, 대피소 개선 사업, 교육 커리큘럼 등으로 환류되어야 한다. 이때 장애인 참가자가 단지 의견 제공자가 아니라, 그 내용을 직접 정리하고 제안하는 역할을 맡는다면, 훈련은 교육에서 끝나지 않고 정책으로 확장되는 강력한 촉매제가 된다.
더 나아가 훈련은 지역의 정기행사로 제도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매년 정기적인 장애인 중심 대피소 훈련을 실시하고, 지역축제나 재난안전의 날과 연계해 주민 전체가 함께하는 체험형 행사를 기획하면, 이는 단지 위기 대응 역량 강화에 그치지 않고, 일상 속에서 ‘모두를 위한 안전’을 자연스럽게 학습하는 문화로 자리 잡게 된다. 훈련은 한 번의 실습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가 함께 안전을 설계해나가는 장기적 관계 형성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
장애인 중심 훈련은 모두를 위한 생존의 기준을 새롭게 설계하는 실천이다.
다음 글에서는 지역 재난 훈련과 대피소 점검을 결합한 통합형 프로그램 기획 전략을 소개 할 예정이다.
이제 안전도, 함께 설계하고 함께 연습하는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