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대피소

재난 발생 시 노약자·장애인을 위한 재난 대피소는 얼마나 준비되어 있을까?

ppulimyblog 2025. 7. 3. 15:33

모두를 위한 재난 대피소는 정말 모두를 품을 수 있을까?

재난이 발생했을 때, 재난 대피소는 생존을 위한 최후의 공간이 된다. 누구든 위급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찾는 곳이 대피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피소'라는 말 속에는 중요한 질문 하나가 빠져 있다. 그곳은 과연 누구나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고,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일까?
한국은 지진, 폭우, 산불, 화재, 한파, 해일 등 다양한 재난에 노출되어 있다. 특히 최근에는 고령 인구가 증가하고 있고, 지체 장애인, 청각·시각 장애인, 휠체어 사용자, 지적 장애인 등 재난 취약계층의 비율 또한 꾸준히 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재난 대피소 설계는 대부분 건강한 성인 기준으로 되어 있다.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고, 신속히 판단해 이동할 수 있으며, 낯선 환경에서도 혼자 판단하고 적응할 수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기준은 노인, 장애인, 어린이, 임산부 등 재난 약자들에게는 불공평하다. 실제로 이들은 재난 상황에서 이동조차 쉽지 않고, 안내판이나 방송을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 재난 대피소에 도착하더라도, 화장실 사용, 의자 이용, 잠자리 확보, 위생 유지 등 기본적인 생존 활동조차 제약이 따른다.

재난 발생 시 노약자·장애인을 위한 재난 대피소


이 글에서는 전국 주요 도시 내 재난 대피소 6곳을 기준으로, 노약자와 장애인을 위한 접근성, 편의성, 안전성이 실제로 얼마나 확보되어 있는지를 실사하고 분석해본다. 종이에 적힌 재난 대피소가 진짜 '모두를 위한 공간'인지 확인해보자.

실제 재난 대피소 6곳 실사 결과: 배제된 사람들을 위한 공간은 없었다

첫 번째로 확인한 곳은 서울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 인근 고층 아파트 단지의 주민 수용을 목적으로 지정된 재난 대피소였지만, 운동장까지 가기 위해선 높은 계단과 급한 경사로를 지나야 했다. 휠체어로 접근하는 길은 따로 없었고, 안내판에도 장애인을 위한 정보는 없었다.
두 번째는 대전의 한 근린공원 재난 대피소. 지도에는 접근성이 좋다고 표시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잔디 경사면과 자갈길이 연결돼 있어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이동하기엔 매우 위험한 구조였다. 특히 공원 안에는 휠체어용 화장실이 없고, 일반 화장실도 청결 상태가 불량했다.
세 번째는 인천 송도국제도시의 주민센터 옆 재난 대피소. 이곳은 신도시답게 정비된 공간이었지만, 지하 주차장을 지나 건물 옥상까지 올라가야 하는 구조였다. 엘리베이터가 있긴 했지만, 비상시 전력 공급이 끊길 경우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네 번째는 부산 해운대구의 공원 재난 대피소. 재난 대피소 내에 노약자를 위한 그늘막, 벤치, 음수대 등의 시설은 있었지만, 비상 전력과 난방 장비, 방한 물품 등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야외에서 노약자가 장시간 머무르기엔 위험한 환경이었다.
다섯 번째는 전북 전주의 학교 운동장 대피소. 입구에는 표지판이 있었지만, 점자 안내판이나 음성 안내 시스템은 없었고, 청각 장애인을 위한 시각 알림도 없었다. 단체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발달장애인이나 지적장애인이 정보를 얻을 방법은 없었다.
마지막으로는 대구의 한 문화센터 대피소. 이곳은 실내 공간을 활용한 드문 사례였지만, 침대나 의자 같은 노인용 휴식 공간이 없었고, 휠체어 사용자가 몸을 누일 수 있는 공간도 확보되지 않았다. 물품이 비치되어 있다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잠겨 있는 보관함이 전부였다.
이렇게 6곳 모두 신체적 불편함을 가진 사람을 위한 공간 설계나 장비 배치가 현저히 부족했다. 말 그대로 ‘평균적 성인’만을 기준으로 한 대피소였다.

재난 대피소 부족, 왜 이런 문제가 반복되는가? 구조와 인식의 이중 부족

노약자와 장애인을 위한 재난 대피소 준비가 부족한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이는 물리적 구조 부족과 사회적 인식 부족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시설 설계부터 배제되어 있다. 재난 대피소의 다수는 운동장, 공원, 공터와 같은 야외공간이다. 이들은 휠체어나 보행 보조기구로 이동하기 어려운 표면 재질과 경사도를 갖고 있으며, 접근 가능한 경로가 확보되어 있지 않다. 건물 내 대피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계단 중심 구조, 비상시 차단되는 전기 설비 등으로 인해 노약자와 장애인이 스스로 진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둘째, 편의시설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다. 휠체어용 화장실, 고령자용 의자, 저시력자를 위한 안내문자 확대, 발달장애인을 위한 시각적 알림 등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재난 대피소가 단지 피신 공간이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다.
셋째, 사회적 관심 부족이다. 행정 당국은 재난 대피소를 운영할 때 재난 약자의 현실적인 요구를 깊이 있게 반영하지 않는다. 예산은 주로 공간 확보와 물자 구입에 집중되며, 구조 개선이나 약자 전용 설비에 대한 투자는 뒷전이다.
넷째, 통합 관리 체계 부재다. 재난 대피소 관리는 지자체, 교육청, 주민센터 등 다양한 기관이 분산해서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장애인 접근성이나 고령자 편의에 대해 공통된 기준 없이 각자 판단하기 때문에, 전국 대피소 간 격차가 심각하게 벌어져 있다.
결국, 지금의 재난 대피소는 모두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을 배제하는 공간이 되어버리고 있다.

모두가 함께 피할 수 있는 재난 대피소를 위해 필요한 것들

노약자와 장애인도 안심하고 대피할 수 있으려면, 지금의 재난 대피소 시스템은 기본부터 다시 설계되어야 한다.
첫째, 장애인 및 고령자 접근성 기준을 제도화해야 한다. 장애인용 경사로, 엘리베이터, 점자 안내판, 음성 안내 시스템, 저시력자용 대형 글자 표지, 고령자용 손잡이 및 의자 등의 기준을 각 대피소 유형별로 구체화해야 한다.
둘째, 노약자 전용 공간과 응급 편의 설비 확보가 필요하다. 간이 침상, 고정식 의자, 담요, 휠체어 진입 가능한 화장실, 자동 온열기, 휴대용 산소통 등은 재난 상황에서 필수적인 생존 도구다. ‘기준 인원 대비 몇 개 이상’이라는 수치화된 표준도 마련되어야 한다.
셋째, 훈련과 교육의 구조화가 중요하다. 재난 대피소 관리자와 자원봉사자는 연 1회 이상 재난 약자 대상 훈련을 이수하고, 실제 대피 시 시뮬레이션을 통해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시민 대상 안내에서도 ‘재난 약자 지원을 위한 기본 매뉴얼’을 공개하고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 재난 약자 스스로의 대응 능력 향상을 위한 정보 전달 시스템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발달장애인 대상 시각 매뉴얼, 청각장애인을 위한 진동 알림, 고령자에게 맞춘 문자 기반 대피 안내 등 맞춤형 커뮤니케이션이 마련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약자를 우선 고려한 대피소 설계 철학의 전환이다. 지금까지는 ‘평균 성인을 중심으로 설계하고, 그 외 사람은 나중에 보완’하는 방식이었다면, 앞으로는 ‘가장 이동이 느린 사람도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를 기준으로 출발해야 한다.
진짜 안전한 대피소란, 몸이 불편한 사람도, 정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빠르게 걷지 못하는 노인도 누구든지 도달하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모두가 피할 수 없다면, 재난 대피소는 완성되지 않은 공간이다.

 

당신이 믿는 재난 대피소, 정말 모두에게 열려 있나요?
다음 글에서는 ‘장애인 거주시설과 연계된 대피소 모델’을 중심으로
지속 가능한 재난 약자 보호체계 구축 방안을 구체적으로 소개할 예정이에요.
관심 있다면 꼭 이어서 확인해 주세요!